고현주- 무한성에의 투항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자연은 부단히 변화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넘어가면서 무수한 생명들을 산포시킨다. 움직임 속에서 하나의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쉬지 않고 옮아간다. 그렇게 쉼 없이 움직이면서 기존의 형태를 만들고 부수며 소멸시키고 다시 생성시킨다. 인간은 그 같은 자연의 생명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반추한다. 자연의 이 무한영역에 자신의 유한한 생을 은밀히 비춰보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과 생명체들을 본다는 것은 인간이 절대적 주체의 자리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성의 타자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한 여정을 따라가는 일이 바로 예술의 길이기도 하다. 불교는 시공간을 초월한 어떠한 실체도 인정하지 않는다. 세계는 커다란 운동이다. 살아있고,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그대로 있지 않고 변화한다. 이른바 제행무상이다. 제행은 만물이 아니다. 물(物)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행이며, 살아있는 일체는 그 행으로써 무상한 것이다. 이러한 무상은 슬픔에 앞서 진리이다. 세계는 무상함으로 슬프다. 그리고 이 슬픔 때문에 인간은 사람다운 비애를 간직하고 그 슬픔이 사람다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

 

고현주는 웅장하고 광막한, 숨 막히게 아름다운 자연(제주도) 풍경 안에 자리한 사람을 찍었다. 횡으로 펼쳐진 화면은 전적으로 자연의 위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사진의 표면을 훑어나가는 시선에 문득 사람의 모습이 ‘겨우’ 걸려든다. 흡사 인물산수와의 점경인물처럼 박힌 그 인물은 직립한 작가의 모습이다. 관자의 눈길을 물리치고 어딘가에 고정된 시선은 의도적으로 자신이 발 딛고 선 현실계를 지우고 자연 너머, 그 안쪽을 헤아리는 듯하다. 사진을 보고 있는 관자의 시선은 화면 속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 보게 된다. 이 인물은 사진의 명증성을 위반한다. 그것은 보기 어려운, 겨우 보여주는 사진에 해당한다. 인물은 자연 속에 파묻혀있고 왜소하고 미약하다. 작가는 거대하고 장엄한 자연 안에 갇힌 자신, 혹은 감정이입 된 타자의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상황은 양가적이다. 죽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연 속으로 투기하는 상황이자 고난과 역경에 빠진 처지를 반영한다. 동시에 지치고 힘든 이들을 위무하는 자연의 무한한 포용력을 보여준다. 이 양가적 감정은 작가 자신의 체험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아마도 작가는 종국에 저 자연 안에서 치유와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치사한 현실과는 다른 자연의 의미를 새삼 깨달았던 것 같다. 그런 자신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은유하기 위한 것이 이 사진이다. 그런데 그 연출이 무척이나 인물산수화와 닮았다. 자연 속에 은거하거나 자연 안으로 들어가는, 혹은 자연을 무심히 관조하는 고사(高士)의 형상이 어른거린다. 산수화에서 엿보듯이 자연속의 그 인물은 물아를 잊고 천인의 간격이 없어지는 순수한 심미의 경계에 들어선 듯하다.

 

작가는 자신의 고향, 제주도의 아름다운 절경을 선택한 후 이를 멀리서 조망한다. 화면 끝까지 밀어 부쳐놓았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의 위용이고 그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그 어딘가에 한 사람이 직립해있다.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자연 사이의 대립!

그 사람은 망연히 화면 바깥을 바라본다. 그러한 시선으로 인해 사진의 좁은 프레임은 균열이 나고 도저히 가둘 수 없는 자연의 크기가 전이된다. 인물의 시선은 구체적인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허공, 무, 공을 보고 있는 듯하다. 공을 본다는 것은 결국 자기 내면을 본다는 것이다.

고현주의 사진은 제주 자연의 아름다움을 대상화 시킨 것이 아니다. 핵심은 사진 속 인물이다. 아니 그 작은 인물의 시선이다. 똑바로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그 시선은 주변 자연에서 벗어나있다. 우리를 등지고 자연을 뒤로 하고 던지는 시선은 결국 무한이고 공이다. 동양의 지식인들은 무의 상태인 공허를 보는 일을 무엇보다도 중시했다.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 생성의 가능 상태인 무가 바로 지식인들이 추구하는 정신적 경지였다고 한다. 무의 경지를 내적으로 체험하고 현실 세계를 자족적 세계로 재구성하는 것, 그것이 또한 예술의 창조이기도 했다. 옛사람들은 자연은 희미하고 허하여 공에 이르게 하니 여기에서 정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자연(산수)의 관조를 통해 도에 이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산에 올라 관조할 때 펼쳐지는 산수의 광활하고 공허한 공간, 혹은 바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무량무변의 광활함과 요원함을 안긴다. 그 안에는 수많은 세월이 유전하는 시간의 지속적 변화 또한 함축돼 있다. 시간적으로 시작과 끝이 없고 공간적으로 헤아릴 수도 한계도 없는 자연의 무한함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인간사는 너무나 사소해 보인다. 그 왜소함을 강조하기 위해 고현주는 자연 속에, 아주 작게 인물을 배치했다.

 

고현주는 자연풍경을 원경으로 보여준다. 그윽한 확장이자 아득한 물러남이다. 이 물러남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자연풍경, 자연의 형상을 뒤로 물리고 유한에서 무한으로 나아가게 하는 장치다. 그로인해 생각과 마음도 물러나고 멀어진다. 선인들은 이를 일컬어 청원(淸遠)이라 했다. 이는 담박하고 그윽한 경지를 가리키는 의경으로서, 물상세계의 아득한 청명함과 내면세계의 깊은 심경을 모두 아우르는 용어다. 자연을 통해 생명의 본성과 삶의 이치를 깨닫는 한편 자연을 통해 정신력을 높이는 내면화 작업이 동양의 공부이자 예술이었다. 그러니까 예술 행위는 자연을 통해 내면을 성숙시키고 우주전체를 품는 존재로 나아가려는 노력에 해당한다. 이는 자연과 일체가 되어 인간세상의 영욕에 의해 때 묻은 마음을 깨끗이 씻어 버림으로써 심미적 자유와 해방을 얻고자 한 것으로 이른바 장자가 말한 ‘소요유’가 그것이다. 고현주의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사진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도 그로부터 멀지는 않아 보인다.

© Photo by KO HYUN JOO